이보성 신세계갤러리 큐레이터 날짜 : 2020.11.23 조회수 : 12,446
지금, 다시, 가볍거나 유연하거나
이보성(신세계갤러리 큐레이터)
또다시 비엔날레 시즌이 찾아왔다. 평소 같았으면 많은 사람이 서울을 비롯한 각 지역에서 열리는 비엔날레를 관람하느라 바빴겠지만, 코로나-19가 창궐한 올해의 상황은 그렇지 않다. 국내 대표 비엔날레인 ‘서울미디어시티’와 ‘광주비엔날레’는 각각 내년 2월과 9월로 행사를 연기했고, 다른 많은 미술 행사들도 오픈일을 미루며 코로나가 잠잠해지길 기다리고 있다. 어찌 보면 미술 행사들의 이러한 선택은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수많은 세금을 들여 만드는 이 행사가 열리기만 하고, 관람객에게 돌아가지 못한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리고 다른 예술 장르보다 더 물리적인 공간에 의존적인 시각예술 행사는 더더욱 그렇다. 그런데 이런 상황 속에서도 과감히 오픈을 늦추지 않고 강행한 미술 행사들이 있다. 부산비엔날레가 그렇고, 창원조각비엔날레가 그렇다. 각 행사의 위원장과 감독은 말은 조금씩 달랐지만, 코로나가 만든 열악한 상황을 피하지 않고 맞서며, 온라인 콘텐츠를 개발하는 등 이제껏 가보지 않은 길을 개척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치며 행사를 강행했다. 특히, 필자에게 창원조각비엔날레의 강행 선택은 조금 의아하게 다가왔는데, ‘조각’이란 매체가 그 어떤 매체보다도 물리적인 공간을 전제하고 있기에 그랬다. 전시를 보기 전, 혹시 이번 전시의 주제인 ‘비(非)’조각이 그 해답이 될까 생각도 했다. 하지만 전시의 시작인 야외공원의 작품들부터 그 기대는 무너져 내렸다.
비조각과 동시대성
언급한 것과 같이 이번 창원조각비엔날레의 주제는 ‘비(非)조각’이다. 조각 비엔날레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인 조각을 부정하는 격이라니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미술 신(scene) 아니 예술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그다지 낯설게 다가오지 않는다. 부정을 통한 자기 존재의 확립이라는 변증법적 시도가 미술계에는 익숙한 방식이거니와, 회화나 조각 등이 자신만의 고유한 영역을 무너트리고 서로 넘나드는 것이 흔한 이 시대에 비조각이라는 주제가 이상하게 다가올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비조각이라는 단어는 감독 스스로가 레퍼런스로 언급한 로잘린드 크라우스의 「확장된 장에서의 조각」(1979)과 이승택의 「내 비조각의 근원」(1980)이 쉬이 떠오르게 하기에 낯설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조각은 여러 가지 이 전시에서 여러 가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그 이유는 비엔날레, 그것도 조각비엔날레의 주제로 비조각이 선택되었기 때문이다. 무릇 비엔날레란 동시대성을 담보한다고 생각하기 일쑤인데, 그렇다면 이미 미술계에서는 익숙해 이제는 언급조차 되지 않는 50여 년 전 담론이 왜 지금 여기에서 다뤄져야 하는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그리고 그것도 다른 비엔날레도 아닌 조각 비엔날레라니. 이것이 감독의 의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조각 비엔날레에서 비조각을 주제로 선택함으로써 필자를 비롯한 많은 관람자 생각의 폭은 비조각에 붙들어 매게끔 했다는 점 하나는 분명했고 성공했다.
전시를 살펴보자. 전시는 야외에서 안으로 이어지고, 섹션별 제목인 ‘비조각으로부터’와 ‘비조각으로’가 무슨 차이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감독이 생각하는 ‘비조각’으로 탄탄하게 구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야외에서 처음 관람객을 맞이하는 시몬 데커의 <버블 껌 인 창원>(2020)은 제목 그대로 풍선껌이 부풀어 오른 모습이 재현된 작품으로 그 물성 또한 유연해 이 전시의 정체성을 잘 보여준다.
이어 납작하게 바닥에 붙어있어 조각이라고 이름 붙이기도 민망한 니콜린 반 스타펠의 <무제>(2020)와 비물질적인 빛을 작품 일부로 끌어들인 오상훈과 스기하라 유타의 <라이트하우스>(2020), 물이 자연스럽게 공중에 퍼져 사라지는 제임스 텝스콧의 <아크 제로>(2020) 역시 이 전시가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시선을 실내로 옮겨 전시장을 가득 채운 여러 작품들도 마찬가지이다. 대표적으로 거품이 흘러나와 형태를 완성하는 미셀 블레이지의 <부케 파이널3>(2020), 공기가 주입되어 부풀어 올라 형태를 완성 그리고 변형시키는 최정화와 이병찬의 작업, 빛이 작품을 투과하여 벽에 상을 맺히게 하는 임정은의 작품 모두 앞서 언급한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전시주제인 ‘비조각’으로 귀결된다. 이승택의 작품들로만 이루어진 특별전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의 대표작이기도 한 <바람>(1969-2002)은 비록 실내에 설치되어 있어 그 작품의 진위를 파악하기 힘들게 되었지만,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는바, 바람에 흩날리면서 작품이 완성되는 작품이다. 이처럼 전시에는 다양한 작품들이 ‘비조각’이라는 이름 아래 진열되고 있다.
주제를 비조각으로 선정함으로써 관람자가 비조각 외에 다른 상상은 할 수 없도록 막아 놓았는데, 디스플레이 또한 비조각만을 생각하도록 한 구성이라니. 기획의 짜임새가 있다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야기하는 문제점들이 없어 보이진 않는다. 무엇보다 작가들이 조각이라는 이름 하에 다양한 매체를 실험하면서 얻고자 (또는 지향하고자) 하는 것이 함몰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니까 이처럼 비조각 아래 각 작품의 의미가 함몰됨에도 불구하고 ‘비조각’이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닐 수 있다면 말은 달라진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서 살펴봐도 그렇게 보이진 않는다. 이번 웹진에서 내부자라고 자기 고백한 김재환이 이번 주제가 역대 창원조각비엔날레에 대한 김성호 감독의 답변이라 말한 것, 그리고 웹진비평의 시작인 이영준의 글을 봐도 그렇다. 어쩌면 김성호 감독이 50여 년 전 담론을 이번 전시의 주제로 꺼내 들은 건, 그만큼 창원이 시대의 흐름과 발맞추지 못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야 비조각만 내세운 이 전시가 내용적으로 의미가 있어진다.
가볍거나, 유연하게
로잘린드 크라우스는 형식주의자라고 비판받는 인물이다. 이번 전시의 레퍼런스인 「확장된 영역에서의 조각」을 읽어봐도 쉬이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녀는 줄곧 자신을 형식주의자라고 비판해온 사람들을 두고 단편적이라고 무시해오곤 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비평의 방식이 형식주의를 지향한다고 해서 그 함의까지 형식주의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녀가 형식주의자가 아닐 수 있는 근거는 그녀의 글 한 편, 한편으로는 판단되지 않는다. 이를 위해서는 그녀가 걸어온 길 전반을 살펴봐야 한다. 필자가 제대로 전시 전반을 파악하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이번 전시는 분명 매체만 남았다는 측면에서 형식적이라면 매우 형식적이다. 하지만 로잘린드 크라우스의 경우가 그러하듯, 이 전시의 함의는 형식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이를 알기 위해서는 김성호 감독이 이제껏 비평과 큐레이팅해오면서 추구해온 방향이 무엇이었는지 다각도의 분석이 필요하다. 어쩌면 지극히 형식적인 이 전시의 이면에는 김성호 감독이 꿈꾸는 새로운 세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이번 비엔날레의 부제는 가볍거나, 유연하거나’이다. 이번 전시는 앞서 줄곧 이야기해왔듯이 가볍거나 유연한 김성호 감독이 말하는 비조각들로 잘 꾸려져 있다. 하지만 작품에 반해 전시구성과 진행 또한 가볍거나 유연했는지는 의심이 남는다.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팬데믹 상황에서 더 유연하게 대처할 방법은 없었는지 전시구성의 단단함에서 야기된 무거움을 가벼움으로 대처할 수는 없었을까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