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전시
한국의 4,50대 조각가들이 각기 개성이 돋보이는 입체작품이 출품된다. 참여작가는 김병호, 김상균, 김영섭, 김주현, 김태수, 김황록, 노준, 서정국, 신치현, 안규철, 안병철, 정명교, 정현, 최태훈, 황영애 등 15명이다. 장소특정적인 공간 맞춤식 작품을 비롯하여 시각뿐만 아니라 촉각과 청각까지 이용한 공감각적인 작품과 관객 참여형 작품들을 출품한다.

꿈꾸는 조각, 서성록(2012 창원조각비엔날레 총감독)

2012 창원조각비엔날레의 출품작을 중심으로
농부들은 철을 따라 쟁기질을 하고 씨를 뿌리고 물을 대고 수확을 한다. 가을에 쟁기질을 하거나 여름에 아직 영글지도 않은 과실을 딴다면, 그것은 한 해 농사를 망치는 것과 다름없다. 예술에도 때에 맞춰 해야 할 활동들과 하지 말아야 할 활동들이 있다. 이점을 무시하면 ‘예술의 농장’에서 거둘 수확을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나 오늘의 예술에는 때에 맞는 활동들과 하지 말아야 할 활동들이 전혀 구분되어 있지 못한 것같다. 즉 작품이 미적인 가치와 예술적인 의미, 관객과 교감은 될 수 있는지, 충분한 준비는 된 상태인지 등등을 검토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우리는 간혹 전시장에서 몰상식한 작품으로 충격에 휩싸이곤 하는데 이것은 ‘예술의 때’를 고려하지 못한 경솔한 행동에서 비롯된 것이다. 공연히 ‘스캔들’을 일으키거나 보면 볼수록 미로에 빠져드는 ‘비의적인 예술’, 조형의 기본조차 갖추어져 있지 않은 급조된 작품에 무슨 결실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적어도 작가가 작품발표를 목적으로 창작행위를 할때 그것이 문화적으로, 미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등이 고려되어야 한다는 얘기다. 손도 대지 않고 코 푸려는 안일한 태도는 성실한 농부와 대조된다.
이점을 고려하지 않을 때 예술은 덜익은 과일처럼 푸석푸석한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일례로 몇 년전 베이징 798 예술지구에 들려 올라퍼 엘리아슨(Olafur Eliasson)의 전시를 보았을 때가 생각난다. 전시장에 들어가니 온통 뿌연 연기로 시야가 막혀 있었다. 바깥에 있다가 갑자기 암실에 들어온 것처럼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었다. 앞이 보이기는 커녕 매캐한 연기로 코가 답답했으나 좀더 참으면 뭔가 근사한 게 나올테지 내심 생각하며 견디어 보았다. 그러나 나의 기대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끝내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내가 경험한 건 뿌연 연기를 뒤집어쓰는 봉변뿐이었다.
작가는 아마도 미로에 갇힌 듯한 자아 혹은 나침반을 잃은 현실을 나타내려고 했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전시는 지나치게 ‘몽환적’이란 인상을 떨쳐버리기 어렵다. 작가가 무엇을 전달하려고 했는지 좀처럼 파악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의도가 있었다고 해도 막연해서 전혀 감상자를 설득시키지 못했다. 먼 곳까지 가서, 그것도 입장료까지 내어가며 본 것이 ‘맹탕’이라니 기분이 영 떨떠름했다. 현대미술이 줄기차게 추구해온 불합리성에 익숙한 터라 크게 놀랄 것도 없었으나 작가에게 걸었던 최소한의 기대가 무너지는 것같아 씁쓸했다. 물론 필자가 경험한 현상은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실재를 잃어버리고 인간 본연의 형상마저도 상실한 것이 오늘날의 시대적 드라마이다. 혐오스럽고 악마적이며 난폭한 언어들이 마구 횡행해도 무덤덤하게 지나쳐버리는 것이 예술계의 현주소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을 그대로 포기해버린다면 그건 너무 무책임할 것이다. 자연계의 창조질서가 무너진다면 바로잡는 것이 순리이듯이 예술적 질서가 무너졌다면 그것을 수정하는 것이 우리의 몫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글에서 예술에서 다시 복구되어야 할 부분이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한다. 그러기 위해 몇 명의 작가들이 언급될 터인데 그들은 대부분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온 작가들이다. 그들은 “과연 내게 예술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며 예술과 자연, 생명, 놀이와 같은 것들을 화두로 삼는다. ‘생명의 공간’에선 상징성을 띤 자연의 이미지를 통해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자연의 확장’에서는 자연 자체에 주목하거나 자연이 주는 쉼과 경이로움을 환기시키며, ‘놀이와 참여’에선 상호소통적인 작품을 통해 작품과 관객의 만남,교감,이해를 도모하는가 하면 시각 뿐만 아니라 촉각,청각을 만족시키는 보다 확장된 조각개념을 알아본다. 그리고 ‘시간의 리듬’에서는 의미있는 시간을 담아내는 작업에 대해 생각해보려고 한다.

생명의 공간
먼저 ‘생명의 공간’에서는 자연적 형태속에서 생명의 소중함을 발견한다. 다시 말해 자연적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그것은 또다른 측면, 즉 생명의 고귀함과 충만함을 살펴보는 통로로 파악된다. 안병철(Byung-Chul, Ahn)과 황영애(Young-Ae, Hwang),김주현(Joo-Hyun Kim)과 김태수(Tae-Sue, Kim)가 여기에 속한다.
안병철의 <생명>(Life-Reflection)은 단순성을 추구한 미니멀 아트처럼 간결한 형태를 띠고 있다. 커다란 씨앗에서 새 싹을 틔우는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또하나의 생명을 배양하고 잉태하는 하단의 씨앗은 보기 좋게 부풀어올라 더도 덜도 모자랄 것도, 남을 것도 없는 최적의 상태를 보여준다. 그런데 이런 모습은 우리가 생각하는 생명의 잉태와는 조금 다른 모습이다. 대개 생명을 돌보고 키우며,심지어 그것을 낳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과정을 거치게 마련이지만 안병철의 <생명> 작품에선 또하나의 생명을 키우는 것이 매우 즐거우며 희망찬 일로 비추어지고 있다. 그의 작품은 생명을 품는 것만으로도 기쁨이 두 배가 되며 창백한 삶을 활기차고 역동적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고광택으로 처리한 금속표면에 비친 세계는 우리를 둘러싼 바다와 하늘과 바람, 빛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보여준다.
김주현의 <꽃>(Flower)도 같은 맥락에 서 있다. 사실 그의 작품을 <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은 꽃같은 빨간색을 띠고 있으며 꽃의 형상을 부분적으로 닮고 있기 때문이지만 전형적인 꽃의 자태를 사실적으로 재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작품에서 우리가 새롭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확장과 상승의 이미지이다. 다시 말해 그의 작품은 마치 연체동물이 천천히 움직이듯이 마디마디가 잡혀 있다. 마디가 연결되어 한 덩어리를 이루고 있는 셈이며 이를 통해 충만한 생명세계를 나타내고 있는 듯하다. 그가 <꽃>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같은 패턴을 반복하여 무한정 증식되는 생명세계를 재현하고 있지 않나 싶다. 그의 작품에선 하나의 면이 다른 면과 관계를 통해 조화로운 전체를 이루고 있는데 이는 보다 나은 삶을 위해선 세대간,이웃간의 이해와 배려의 중요성이 얼마나 긴요한지 알려주고 있다.
황영애의 작품도 식물성 이미지에서 모티브를 취하고 있다. 형태는 구체적이나 그 역시 어떤 상징체계 내에서 자연의 이미지를 끌어다 쓰고 있다. <자연의 숨결>(Rhythm of the Forest)에서 나타나는 것은 겨울의 이미지이다. 추위가 맹위를 떨치는 겨울은 무엇을 맺고 수확을 거두는 계절이 아니라 반대로 무엇을 걷어내고 잘라내는 혹독한 시험을 거치는 기간이다. 작품의 하단에 아무것도 없이 벌거벗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맺지 못하는 불모의 계절임을 암시하고 있고 그 옆의 구조물 또한 몸을 또다른 구조물에 의존하는 형국이다. 그러나 박탈이란 사실 또다른 것을 준비하는 기간이며 그런 점에서는 경작이라고 할 수 있다. 어려운 난관을 거친 나무는 이제 풍성한 열매를 맺기 시작할 것이다. 고갈이 풍요의 근간이 된다는 것을 이 작품은 암시하고 있다.
김태수의 <에코 프로우>(Eco Flow – Sprout Blossom)는 리드미컬한 추상작품이다. 색깔이 다른 부분들을 볏단을 묶듯이 묶어 곡선의 흐름을 준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 작품을 보고 흐르는 물결을 연상할 수도 있을 것이며, 바람결을 연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혹자는 수많은 시간의 흔적을 간직한 나무테를 연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것을 암시하든 작가는 행복한 세계를 상상하며 제작했을 것이다. 그의 작품이 보여주는 다른 단층들은 서로 다른 성질을 지녔으면서도 공존하며 부드러운 유선형을 유지한다. 이 유선형은 작가에 의하면 <에코 프로우>이며, 곧 생명의 밑거름이자 원천이 된다. 그것은 끊임없이 이어진다는 점에서 리듬감을 띠고, 이질적인 것을 조화를 이룬다는 점에서 조합을 이루며 생명의 소망을 잃지 않는다는 점에서 연속성을 지닌다.

자연의 확장
앞의 작가들이 자연,그중에서도 식물 이미지에서 생명의 흐름을 찾는다면 ‘자연과 확장’에서는 자연 자체 또는 자연이 주는 풍성함에 주목한다. 여기에는 서정국(Jung-Kug, Seo),정명교(Myeong-Kyo, Jeong),김황록(Hwang-Rok, Kim), 김영섭(Young-Sup, Kim)이 포함된다.
서정국은 덩굴같이 뒤엉켜 있는 대나무를 주된 테마로 삼으며 작은 마디들은 일정한 리듬을 가지고 곡선의 형태를 만들어가고 있다. 스테인레스가 가지는 차갑고 견고한 속성과 그리고 능청스럽게 휘어진 대나무의 이미지는 상반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에서는 대범하게 통합되어 있다. 덩굴을 연상시키는 그의 작품은 풀밭에 놓이는 순간 감추어왔던 의미를 공개하게 된다. 생명없는 스테인레스에서 ‘생명의 줄기’(Stem of Life)로 순식간에 변모된다. 줄기는 숲과 일체를 이루며 대지를 덮어간다. 우리가 감상할 준비만 되어 있다면 자연의 풍광속에는 엄청난 아름다움이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재료는 물질성, 그러니까 자기의 존재감까지 잃어버리며 환경과 혼연일체가 되어 화합과 조화의 이상을 함축적으로 표상하고 있다.
정명교는 하늘의 흘러가는 구름마저 꾸벅꾸벅 졸고 있는 평화스런 시골풍경을 잠시 옮겨다놓은 것같다. 물잠자리가 강아지풀위에 살짝 내려와 있고 그 옆에는 개구리밥 모양의 의자가 설치되어 있다. 누구나 와서 앉을 수 있고 담소도 나눌 수 있다. 강아지풀위에 내려않은 거대한 물잠자리는 날개가 상하로 움직여 실문을 확대해놓은 모습이다. 동세의 부분을 강조하는 작품은 여럿 있지만 조각에서 풍경의 도입은 조금은 이례적이다. 정명교는 전체 작품을 풍경화를 보듯 적절한 구성과 이미지의 조합으로 감상자를 즐겁게 한다. 연극무대같이 서술성을 띈 작품이 시골에 와있는 것같은 기분좋은 착각을 일으킨다.
김황록의 작품에는 닭과 말, 메뚜기 등의 이미지가 등장한다. 실제의 동물과 곤충을 정교하게 캐스팅한 청동 부조물이 보기에 따라서는 가늘게 늘어뜨린 실선들로 인해 마치 동물들의 이미지가 구조물속에 묻혀지거나 소멸된 것같은 환영을 일으킨다. 김황록이 자신의 작품에서 말하려는 것은 ‘사물들의 속삭임’이다. 사실 사물들,특히 그가 캐스팅한 이미지들은 물질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작가는 사물들에게 말을 건네고 숨결을 주입함으로써 그것들이 ‘또하나의 삶’임을 언급하고 있다. 언젠가는 모든 실재들이 사라지고 그것들의 존재조차 희미하게 잊혀져갈 것이지만 그러한 추상(追想)이야말로 아스라이 저물어가는 과거를 깨우는 유력한 수단인지도 모른다. 그의 작품은 익명의 사물들에 대해 기념비적 성격을 띤다고 볼 수 있다.
김황록이 사물의 존재를 더듬어간다면 김영섭은 단절과 두절속에서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작업이다. 전자가 사물 자체에 집중한다면, 후자는 ‘깨어진 세상’과 ‘회복된 세상’을 조망한다. 관계의 측면에서볼 때 김영섭의 작업은 크게 세부분으로 나뉜다. 하나는 완전히 통합된 관계요 다른 하나는 끊어진 관계요 마지막으로는 끊어진 것을 다시 봉합한 관계이다. 아무런 이상징후도 발견되지 않는다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지만 두 동강이가 난 부분은 끊어진 다리를 볼 때처럼 휑하게 느껴진다. 있어야 할 것이 없기에 허전하기 그지없다. 사실 김영섭이 <동질성>(Homogeneity 2012)에서 제일 주목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끊어진 부분을 봉합한 부분일 것이다. 나무로 이어 종전과 같은 상태로 유지되도록 했지만 사실 완전하게 회복된 것은 아니다. 마치 환부가 원래대로 깔끔하게 나으려면 긴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그의 작품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 작품속에 완전함, 깨어짐, 치유가 나타나 있다. 치유는 완전함보다는 못하지만 깨어짐보다는 훨씬 나은 상태가 아닐까?

놀이와 참여
다음으로 살펴볼 유형은 ‘놀이와 참여’이다. 통상 사람들은 놀이를 유흥 또는 오락과 구별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유흥과 오락이 소비주의의 산물로 쾌락을 부추긴다면 놀이란 우리의 빈약해진 상상력에 불씨를 지핀다. 어린아이들이 놀이를 신나게 즐기는 것은 그 자체로 즐겁기 때문이고, 아이들이 놀이를 통해 어른과는 다른 세상을 보기 때문이다. 유흥과 오락은 잠시는 즐거울지 몰라도 결국에는 우리에게서 기쁨을 앗아가지만 놀이는 삶을 활기차게 한다. 만족을 모르는 욕망을 촉진하는 소비문화의 속성과 달리, 작은 놀이를 통해 우리는 온전한 만족을 배울 수 있다. 그런데 놀이란 누군가의 참여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몇몇 작가들은 놀이의 형식에다 만지고 놀며 감상자와 작가의 만남이라는 상호 관계를 도입하여 놀이효과를 한층 높여주고 있다. 시각뿐만 아니라 촉각과 청각을 이용하는 것도 참여의 즐거움을 배가시키기 위해서이다.
정현(Hyun, Chung)의 <소리의 숲>(Forest of Sound)은 2백여개의 각기 다른 길이와 굵기의 파이프로 구성되어 있다. 그가 작품을 통해 들려주고 싶은 것은 자연의 소리이며 그래서 작품형태도 갯벌의 소라모양을 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바람이 불거나 숲속을 산책하는 사람들이 만지면 파이프끼리 부딪히며 연주를 시작한다. 산사의 풍경소리처럼 은은하고 깊은 여운을 남기는 소리이다. 흔히 조각하면 보는 것으로 머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소라 이미지를 차용한 정현의 파이프 작품은 감상자의 참여로 완성되는, 음향까지 고려한 작품이다. 소리를 냄으로써 은은한 소리와 더불어 잠시 생각에 잠기고 아름다운 선율에 마음을 내맡기게 된다. 작가가 의도적으로 소리의 상징형태인 소라의 이미지를 차용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바람소리, 파도소리,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 게다가 파이프에서 나는 소리까지 합쳐 감상자는 자연의 로얄박스에 앉은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안규철(Kyu-Chul, Ahn)의 작품 또한 놀이하는 작품이다. <하늘과 빛과 바람>(Sky, Light, and Wind)은 관객이 작품에 들어가 숨을 고르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공간이다. 그의 작품은 “하늘과 빛과 바람과 같은 원초적인 자연과 만나는 공간”이며, “자연의 신호들을 수신하는 작은 관측소이다.” 관객은 그안에서 하늘과 구름과 햇빛과 벌레소리, 밤낮이 엇갈리는 시간의 흐름을 만나게 된다. 창공을 바라보면서 문뜩 우주란 얼마나 광대한 것인지, 또한 깊이와 넓이를 측정할 수 없는 영원은 얼마나 신비한지 깨달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하늘과 빛과 바람>은 특별한 만남이 이루어지는 ‘초현실적인 공간’이랄 수 있다.
김병호(Byoung-Ho, Kim)의 나팔작품은 흥미롭다. 대지에서 갑자기 나팔이 솟아오른 것도 그러하지만 그 나팔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부는 나팔이 아니라 재탄생한 나팔이기 때문이다. 한송이 꽃을 보는 것과 군락을 이룬 꽃을 보는 것이 다르듯이 여러 나팔이 군집을 이룬 악기를 보는 것은 나팔에 대한 강렬한 인상을 남겨준다. 그리고 각 나팔을 통해 작고 규칙적인 리듬이 흘러나오게 함으로써 작가는 세상을 향해 노래하고 있는 것같은 느낌을 준다. 그의 작품은 경이로운 창조세계가 얼마나 환상적인지 들려주는 확성기처럼 보인다.
노준의 <물위의 클로와 수키>(Clo and Suki on Water)는 우리는 해맑은 눈으로 세상을 대했던 유년시절로 인도한다. ‘클로(Clo)’와 ‘수키(Suki)’는 노준이 만들어낸 친근한 동물 캐릭터로 물놀이를 하는 고양이 모양의 ‘클로’와 강아지 모양의 ‘수키’를 상상적으로 꾸며낸 것이다. 바닥에는 물을 상징하는 비정형의 형체가 흐르고 그 위에 두 캐릭터가 포개져 있는 양상이다. 그의 작품은 근래 유행하는 만화나 에니메이션 캐릭터에서 착안된 것이 아니라 작가가 직접 고안해낸 상징물이라는 점에서 구분된다. 그의 작품은 한마디로 귀엽고 앙징맞다. 그의 작품은 관객들이 만지고 껴안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접촉성까지 고려한다. 반려동물인 고양이와 강아지는 우리 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같은 동물을 매개로 우리는 서로 말문을 트게 되고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작가는 동물을 테마로 한 작품을 통해 인간과 동물, 자연이 공존하는 따듯한 세상을 담아내고자 했다.

시간의 리듬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시간의 리듬’이다. 시계없는 하루란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누구나 시간을 거스를 수 없으며 앞질러 갈수도 없다. 알람소리를 듣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해 시간에 맞추어 일과를 소화해내기도 한다. 시간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곳은 없다. 시간속에 인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어쩌면 인간은 시간과 나란히 보조를 같이하면서 살아가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김상균(Sang-Gyun, Kim)의 <인공낙원-기억의 방>(Artificial Paradise 2012 – Room of Memories)은 등대 모양의 원통형으로 되어 있다. 요새를 방불케 하는 두껍고 단단한 콘크리트로 된 구조물 곳곳에 홈이 파져 있는데 그속에는 옛 건물들이 들어앉아 있다. 덧없는 시간과 함께 사라진 건물들이 마치 박물관안에 진열된 유물들처럼 설치되어 있다. 건물은 그 시대의 숨결을 가장 잘 보여주는 유물이란 점에서 그의 작품은 역사성을 띠며 이제는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는 시대를 회상케 한다. 회색빛 콘크리트 색조가 안겨주는 빛바랜 추억과 함께 그 건물은 기쁨과 슬픔을 공유했던 사람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의 <인공낙원>은 시대에 대한 기억을 봉인한 작품이자 옛 자취들을 화석처럼 새겨놓은 기념비이기도 하다.
최태훈(Tae-Hoon, Choi)의 <시간의 피부>(Skin of Time)란 작품도 같은 맥락에 놓여 있다. 그의 작품은 수만개의 작은 철조각을 서로서로 연결한 것이다. 가까이에서 보면 불로 용접한 자국이 나 있다. 마치 오래 사용하여 누렇게 변한 흔적이나 마모된 기물의 표면을 보는 것같다.
작가가 이처럼 빛바랜 분위기를 연출한 이유는 <시간의 피부>란 타이틀이 말해주듯이 최태훈은 자신의 시침을 과거로 돌려 시간과 함께 고락을 영위해온 삶을 반추한다. 사람이건 자연이건 도도한 시간의 행진을 거스를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시간은 인간을 넘어서고 역사마저 능가하는 것같다. 작품을 보면 이점이 더욱 뚜렷해진다. 10미터 가량의 나팔모양을 하고 있는 그의 작품은 점점 더 관이 넓어지고 마침내 나팔을 통해 어떤 소리를 뿜어내도록 계획되어 있다. 언뜻 보면 단순히 나팔을 크게 확대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실은 시간의 흐름에 귀를 기울이라는 메시지로 들린다.
신치현(Chi-Hyun, Shin)의 <Walking Man>은 한 남자가 당당하게 앞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포착한 작품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뭔가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인체형상은 하나의 덩어리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수많은 네모조각들을 종합하여 이루어졌다. 이 작품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인체의 동작이다. 이 남자는 어디론가 두 팔을 앞뒤로 흔들며 씩씩하게 걸어가고 있다. 그것은 여지없이 오늘을 살아가는 이웃의 모습이다. 그 인체는 작가일 수도 있고 그의 작품을 보는 사람들일수도 있으며 분주한 도시인일 수도 있다. 어디로 간다는 것은 바꾸어 말해 목적성을 띄고 있다는 것이며, 보다 확대해서 보면 ‘열망하는 인간’을 형상화했다는 말로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작품은 자신의 삶을 개척하는 일에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에게 바치는 헌사로 기술할 수 있으리라 본다.

깊이있는 사고와 예술
앞에서 우리는 꿈을 실은 조각과 관련하여 몇 명의 작가들을 살펴보았다. 그들은 작업 스타일이나 발상면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지 않지만 예술이 놓쳐서는 안될 지점, 예술적 개성과 포장 이전에 예술에 대한 근본적인 고찰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가령 ‘생명의 공간’에선 생명의 위대함을, ‘자연의 확장’에선 평화롭게 살아가는 자연생태를, ‘놀이와 참여’에선 만지며 놀이하는 참여의 즐거움을, ‘시간의 리듬’에선 시간에 대한 기억을 각각 특징으로 삼고 있다. 관객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단순히 타자로서가 아니라 나의 작품을 완성시켜줄 파트너로서 인식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작품의도가 분명하고 조형적 수사(修辭)에서는 자상한 배려심마저 느낄 수 있다. 작가 중심으로 제작되었으나 소통의 중요성까지 고려하여 만들었다는 것이 장점으로 생각된다.
우리가 생각해온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예술과 현재 진행중인 예술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처럼 엄청난 괴리가 있는 같다. 스케일과 성격도 달라졌지만 의미에 있어선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 뚜렷하다. 종전에는 예술이 우리의 의식을 고양시키는 등 어떤 식으로든 ‘삶에 유익’을 끼치는 쪽으로 발달해왔다면, 지금은 얼마나 ‘투자가치’가 있느냐에 온통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예술이 재산증식의 대상이 되었다는 말이며, 그래서 작품을 팔아 얼마를 벌었는가가 그 사람의 ‘능력’을 말해준다. 우리와 같은 구식 예술론을 신봉하는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현실이다. 항상 새롭긴 하지만 덧없는 욕망이 예술계를 속박하고 있다.
예술에 어떤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가장 지혜로운 투자대상이기 때문이 아니라 생산적이 되어야 한다는 관념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주기 때문이다. 그런 역할이 없다면 얼마나 삭막할 것인가?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떨까. 우리 사회에서 ‘생산성’보다 더 높이 받들어지는 덕목은 별로 없으며, 이런 상황은 우리에게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를 안겨준다. 일단 생산성이 우리의 가치를 측정하는 척도로 간주되면,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된다. 시간을 얼마나 투자했는데 그에 대한 보상은 얼마나 대단할 것인가? 하는 생각을 품게 될 것이다. ‘생산성의 노예’란 말은 지나친 감이 있지만 우리의 의식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종래 예술가들은 잠자는 상상력을 깨우고 창조질서의 아름다움을 환기시키며 우리의 내면을 깊이있게 살펴볼 수 있게 해주는 역할에 충실해왔다. 물론 이전에는 ‘신-인간’ 관계를 조명하는 일에 주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방식은 줄곧 개인의 자율성과 자유와 진보를 방해한다는 이야기에 담겨 후대에 전수되어왔다. 전통은 언제나 발전과 혁신의 걸림돌이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 현재는 ‘구속력있는 외부권위’(David F. Wells)는 찾아볼 수 없다. 전체그림을 파악할 수 있는 길을 잃어버린 오늘날의 예술가들은 가시적인 생산성과 구체적인 보상이 있는 일만을 가치있게 여기는 시스템속에서 엄청난 압박감을 느끼며 이 흐름을 쫓아가려고 애를 쓰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람들이 지겨워하지 않도록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하며, 일부 작가들의 경우 더 많이 생산하기 위해 조직적인 ‘팩토리’ 체계로 움직이는 경우도 있다. 생산성의 문화는 예술가에게 어떤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가? 많은 예술계 관계자들이 시간처럼 창의력도 주요 투자품목이며, 언제든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여긴다. 작가가 내면에 침잠되어 있는 것을 꺼내고 생각을 추스르며, 그것을 구상화하는 것의 필요성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과 이웃과 공동생활의 다른 영역에 미치는 영향을 곰곰이 성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지, 혹시 그런 것들은 시간을 축내므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반문하고 싶다.
목표달성이라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문화에서 목적에 이르는 여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우리가 인스턴트음식, 고성능컴퓨터, 스마트폰 등을 특징으로 하는 문화로 인해 속도에 집착하게 되었다는 것과 이런 습관이 우리의 정신적인 삶을 포함한 삶의 다른 영역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친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필립 케네슨(Phoplip D.Kenneson)이 지적한 것처럼 ‘응급처치 문화의 포로’가 된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예술에 대해서도 조급한 태도를 갖게 된 것이다.
우리는 직접 체험에서 오는 어떤 심도있는 통찰 그리고 깊이있는 사고와 성찰이 야기하는 확고한 인식에 익숙해져 있지 않다. 말하자면 실재와의 연결점 내지 접촉부위가 그만큼 헐겁고 비좁다. 체험과 인식의 깊이가 약하다보니 ‘기교 능사주의’에 빠지기 쉽고, 그에 따라 ‘효과’에 집착하게 된다. 이런 것들은 모두 숙성되지 못한, 임시처방의 산물들이다.
어쩌면 오늘날은 뭔가를 더하는 시기가 아니라 잘라내야 하는 시기인지 모른다. 어떤 의미에선 박탈이 내일을 대비한 경작이다. 역설적인 이야기인지 모르지만 고갈은 풍요의 원천이 된다. 고갈을 느낀다는 것은 거기에 뭔가가 다시 채워져야 한다는 사실을 직시한다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글에서 살펴본 작가들이 생명의 고귀함,자연의 경이,체험에서 오는 즐거움,시간의 의미 등을 통해 자신의 ‘뽀얀 속살’을 보여준 것은 이런 점에서 높이 살만하다. 아무래도 엉성한 그물로 짠 작품보다 ‘확고한 삶의 통찰’이라는 단단한 재질의 그물로 짠 작품이 훨씬 공감의 진폭도 크고 설득력을 지니는 것은 당연한 이치가 아닐까.


특별전
참여작가로는 제임스 앵거스, 데이비드 브룩스, 미쉘 드 브로인, 제임스 홉킨스, 카즈야 모리타 등 5명의 작가가 초청되었다. 특히 사치 갤러리를 통해 주목 받고 있는 영국의 신예 조각가 제임스 홉킨스는 국제도시 창원을 상징하는 지구본을, 캐나다에서 공공예술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한 미쉘 드 브로인은 5미터 규모의 거대한 계단 구조물을, 건축가 카즈야 모리타는 벽돌을 쌓아 만든 돔형의 쉼터를 통해 돝섬을 찾는 시민들과 소통의 공간을 지을 예정이다.

공공조각의 영역확장, 이대형 (수석 큐레이터, 창원조각비엔날레)

비유하자면 성벽과 성문이 사라진 상황이다. 사방에서 밀려오는 인파를 견뎌야 하고, 외부의 간섭에 노출되고, 그리고 그것이 위엄있는 성곽이였는지 조차 망각되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공공조각은 이처럼 사람들의 움직임 한 가운데서 무방비 노출된 채 생존해야 하는 예술형태이다. 미술관이란 울타리 없이 현장에서 지역 커뮤니티와 소통하고, 참여와 상징의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 공공의 재원으로 설치되고, 유지되어야 하기에 작가의 상상력은 커뮤니티의 보편적 이해 속에서 때로는 제한되고 편집된다. 그래서 작가의 의도가 만들어낸 정체성보다 랜드마크, 모뉴먼트, 건축구조물, 문화적 상징물, 미학적 오브제 등 그것이 놓여진 문맥에 의해 사람들로부터 부여받은 정체성이 더 중요하게 유통된다. 그렇다고 공공조각을 도시재생이나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는 대안으로만 바라보고 기능적 프레임 안에 그것의 정체성을 가두어서는 안된다.

지역성에 근간하면서도 조각적 소재주의에 빠지지 않고 창원조각비엔날레에 경쟁력있는 정체성을 만들어낼 수 있는 전략은 무엇일까? 창원조각비엔날레는 이 같은 딜레마에서 출발한다. 보편적 소통의 오브제인 공공조각과 큐레토리얼 차이를 실험해야 하는 비엔날레라는 이질적인 조합을 풀어야 한다. 기획전시 중심의 뮌스터 조각프로젝트와 벵쿠버 조각 비엔날레와 달리 조각품이 야외에 영구설치되는 창원조각비엔날레의 원칙은 작가들의 소재선택의 폭을 제한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제약은 작가들로 하여금 새로운 재료를 찾는 대신 주어진 재료를 바탕으로 새로운 가공방식을 연구하고, 돝섬과 한국의 근대사에 대한 학습을 이끌어 내며 보다 치열한 고민을 하게 만들었다. 제임스 홉킨스는 돝섬의 경관을 반영하는 개념적인 지구본을 제작했고, 미쉘 드 브로인은 한국 벽돌건축의 역사를 자신의 작품으로 응용했다. 제임스 앵거스는 모더니즘을 상징하는 강철주조 기법을 이용해 자연과의 대비를 유도했다. 반면 일본의 카즈야 모리타는 돔 형식의 벽돌건축구조물로 숲 속에 시민들을 위한 작은 명상공간을 만들어 냈다. 가장 논란이 많았던 데이비드 브룩스의 작품은 거대한 트렉터를 땅 속에 묻어 자연과 문명, 환경과 경제논리, 과거와 미래, 삶과 죽음 등에 대한 질문을 남겼다.

이들 작품들은 예술과 일상 사이의 지속적 관계성 구축을 예술철학의 주요한 과제로 생각했던 철학자 존 듀이1의 철학처럼, 첫째 관객과의 창의적인 소통을 이끌어 내고, 둘째 영속적인 구조물로서 시민들의 삶 속에 스며들기 위한 목적을 공유했다. 지역 고유의 미술문화와 환경을 존중하면서도 국제적 네트워킹을 통해 문화적 헤게모니를 배양시킨다는 난제를 풀어가기 위해 필요 이상의 소통을 해야 했다. 권혜정, 손다위, 허은빈 큐레이터의 도움으로 수백여통의 이메일과 전화통화를 통해 한국에 와 본적 없는 작가들을 설득시키고, 교육시키고, 안심시키기를 반복했고, 수십 차례 반복된 이병호 조각가의 현장 답사를 통해 해외작가들의 사전 작업의 속도를 높일 수 있었다. 그리고 소위원회와 대위원회를 통한 지역 시민 전문가들과의 소통과정을 통해 시민접근에 대비한 안전도와 조형적인 완성도를 점검했다.

1979년 에세이 “조각 영역의 확장”을 통해 로잘린 크라우스가 건축, 경관 등 비조각예술과 조각과의 경계가 현대미술에 있어서 점차 사라지고 있다고 진단하였지만, 30 여년이 흐른 뒤 여전히 “조각은 무엇인가?”란 질문에 대한 시민들의 답변은 보수적이다. 그런 측면에서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지닌 해외작가들의 지역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연구,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완성된 작업은 조각의 정의를 확장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라고 생각한다. 로버트 스미슨의 1970년대 대지미술 그리고 건축적 구조물을 연상시키는 리차드 세라의 1980년대 철판조각까지 조각의 외연 확장의 역사가 작은 돝섬에서 이루어지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그런면에서 충분한 리서치가 선행되어야한다. 그래야만 관객, 재료, 그리고 자연환경 사이의 관계를 적절하게 작품으로 다룰 수 있게 된다. 하나의 문화를 만들어낸 다는 것은 그래서 조각이란 장르의 외연을 확장한다는 것은 이데올로기의 구축과 다르지 않다. 그 만큼 어렵다는 이야기이다. 거대한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트렉터를 집어 넣는 설치작업 <숲속의 기계>을 출품한 데이비드 브룩스은 역사, 인프라 스트럭처, 미학, 재료, 그리고 거기에 따르는 사회적 책임까지 예견하는 통찰력을 보여준다. 그는 작품을 통해 생태학적 위기의 원인과 결과, 그것이 상징하는 문화적 고착상태, 그리고 그로부터 인간이 자연을 어떻게 인지하고 이용하고 있는지 살핀다. 그의 해체적이고 심지어 파괴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실험적인 설치 조각작품은 물리적인 구축보다는 상호간섭, 상호작용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것이 어떻게 생겨먹은 조각인가의 문제가 아닌, 그것이 시민들로 하여금 어떤 각성과 반응을 이끌 낼 것인가의 문제가 중요하다.

루이스 설리반의 명언 “형식은 기능을 따른다”와 뉴욕 지하철 강철주물기둥 사이의 공통점은 모두 10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그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제임스 앵거스는 근대건축의 한 축을 완성한 루이스 설리반의 철학과 여전히 견고하게 뉴욕 지하철을 지탱하고 있는 강철주물기둥 사이에서, 현대자본주의 그리고 그 낙천주의적 팽창이 남겨놓은 과잉 기계생산 시대의 흔적들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것들이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어떤 상징으로 다가오는가 묻는다. 컴퓨터 디자이너, 엔지니어, 수학자, 과학자와도 협업하고 있는 제임스 앵거스는 다양한 상징으로부터 추출한 아이디어를 강철주물 기법을 통해 물질화시킨다. “현재 작업하고 있는 작품이 어쩌면 더 거대한 구조물의 일부분은 아닌지. 그런 면에서 나의 작업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추출되는 어떤 것일지도 모른다.”라는 제임스 앵거스의 설명은 그의 재료에 대한 생각을 잘 보여준다. 일정한 모듈을 이어 붙여 제작한 <파이프라인의 압축과 확장> 은 효율성을 강조한 모더니즘적 구조가 어떻게 유기적인 포스트모더니즘적 유연한 구조로 재탄생하게 되는지 보여주고 있다.

미쉘 드 브로인은 주어진 문맥에 따라 다양한 재료를 활용하는 작가이다. 사람들의 간섭과 참여를 유도하는 구조물을 만들면서 항상 그것이 이미 거기에 있었을 것 같은 느낌을 살리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작품이 설치될 지역의 역사와 건축재료에 대해 공부하고, 사람들의 행동방식과 관심대상에 대한 연구를 놓치지 않는다. 누구나 알 수 있는 보편적인 오브제를 활용하고 있지만, 그것의 구조가 4차원적인 공간을 상상하게 만들기 때문에, 어느덧 그의 재료는 신비주의적 아우라를 발하게 된다. 철학, 언어, 과학, 미술사, 심리학 등 다양한 인문학적 토대 위에 구축된 그의 작품은 물리적인 오브제와 비가시적 개념, 일상과 공적인 공간 사이의 관계를 재해석하게 만든다. 이번에 출품한 <인터레이스>는 뫼비우스 띠를 연상시키는 순환계단과 근대화의 상징이었던 적벽돌을 주재료로 사용하며 순환하는 동양적 역사개념을 상징적으로 구조화 하였다.

제임스 홉킨스에게 있어 관객과 작품 사이의 관계설정은 매우 중요한 출발점이다. 작품을 인지하는 시각화가 어떤 과정과 판단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인지 알기 위해서 반드시 이 관계설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출품작 <지구본>을 예로 들면, 작품의 타이틀과 그것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세지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지구본이라고 했지만 관객은 거울처럼 반짝이는 지구본 표면을 보면서 세계지도 대신 <지구본>이 놓인 돝섬의 주변환경과 관객 자신의 모습과 대면하게 된다. 나무나 종이 표면 위에 지도를 그려 넣어 완성되는 전통적인 지구본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 전통적인 지구본이 세계 속에서 내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개념적인 이미지를 떠오르게 만든다면, 제임스 홉킨스가 만든 지구본은 내가 위치하고 있는 환경과 풍경을 반사면을 통해 보여주며 주체와 문맥의 상호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작품의 위치와 관객의 시점 사이의 변화에서 비롯된 시각적인 환영은 반전을 요하는 제임스 홉킨스의 네러티브를 구성하는 주요한 모티브인 셈이다.

인류문명이 시작된 이래 흙, 나무 등 쉽게 채집할 수 있는 재료를 중심으로 다양한 건축 기법들이 발전되어 왔다. 그러나 근대문명이 시작되면서 이런 자연친화적인 재료들은 구시대적이고, 원시적이라는 이유로 외면 받기 시작한다. 카즈야 모리타는 일본 교토를 근거지로 옛 선조들이 수 천년 동안 지켜왔던 전통적 기법을 되살리려는 노력을 실천하고 있는 건축가이다. 작가는 지방색과 전통을 지켜오고 있는 수천 년된 주변 건축물들을 보고 자라며 많은 영감을 얻었다. 지방의 토착 재료, 즉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가지고 과거의 전통 문화 유산을 되살리는 움직임은 오늘날 큰 도전이다. 카즈야 모리타 건축의 큰 특징은 전통과 현대의 소통에 있다. 전 세계 어디에서든 볼 수 있는 재료와 기법으로 대량으로 만들어진 근대적 건축물들과 다르게, 지역에서 발생한 재료를 가지고 그 지역환경에 맞는 건축물을 만든다는 것이 어쩌면 21세기 건축의 대안일지 모른다. 과거의 지혜와 근대적 과학기술이 융합하고 또한 주변 환경과 소통하는 그런 건축물. 이번 창원조각비엔날레를 통해 카즈야 모리타의 건축팀은 작은 일본 전통 다실을 연상시키는 파빌리온 <벽돌더미>를 숲 속에 만들었다. 주목할 점은 주재료로 사용된 한국의 흑벽돌과 스페인의 돔구조 그리고 일본의 건축술까지 과거와 현재라는 수직적 소통을 넘어선 동양과 서양의 수평적 소통을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상 5명의 해외 작가들은 저마다 다른 접근과 주제의식을 가지고 이번 비엔날레에 참여했다. 그래서 생경하고 개념적으로 익숙치 않은 불편함을 야기할 수도 있다. 1889년 파리 국제 박람회를 기념하기 위해 1887년부터 1889년까지 3년 동안 당대의 건축, 예술, 과학의 합작이 만들어낸 에펠탑은 오늘날 프랑스 파리의 아이콘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 이 공공 조형물이 설치되었을 때, 파리의 일반 시민들은 물론이고 대표적인 예술가들까지도 합세해서 흉물스런 공공조각이 등장했다면서 맹비난을 쏟아냈었다.2 이 같은 역사의 아이러니는 언제든 되풀이될 수 있다. 분명한 사실은 예술의 역사는 철학의 역사, 문학의 역사, 기술의 역사와 항상 맥을 같이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면에서 공공조각의 전통적인 정체성을 지키는 것 못지않게 그것의 영역확장이 어쩌면 더 중요할 수 있다. 빛을 이용한 조각, 대지미술, 설치미술, 비디오, 인터넷, 그리고 심지어 사이버 정보 메세지 보드에 이르기까지 재료와 표현수단의 다변화는 관객들과 소통할 수 있는 다양한 방식을 가능케하는 효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점점 더 많은 작가들이 그것들을 활용하고, 실험하고, 생산해낼 것이다. 그리고 작가들이 시도할 실험의 생경함에 익숙해지는 관객들의 반응 속도 또한 더욱 빨라질 것이다. 그래서 미래의 조각에 대한 정의는 항상 그자리에 변함없이 존재하는 물리적인 오브제만을 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공간을 새롭게 해석하게 만들고, 다양한 각도에서 접근(감상을 넘어선 접근을 의미한다)이 가능하며, 문맥에 맞는, 관객의 요구에 맞춘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사이즈와 색상까지도 컨트롤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반드시 물질적인 오브제일 필요는 없다)까지도 조각의 정의에 포함시켜야 할지도 모른다.



1 Rudolf Arnheim, The Dynamics of Architectural Form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77), 215.
2 Roland Barthes, The Eiffel Tower and other Mythologies, tr. Richad Howard (Bel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7), 3-18.


출품작가 드로잉전
이번 비엔날레 참여작가들의 소개와 작품개요, 밑그림을 볼 수 있는 전람회가 별도로 열린다. 어떻게 작품이 탄생하였는지 아이디어단계에서 완성단계까지의 작품제작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놓았다.